뇌가 글을 쓴다고?
하이퍼그라피아, 그것은 생경한 용어였다. 하버드 의대 신경과 교수가 쓴 이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나는 무엇보다 익숙지 않은 용어들 앞에서 주춤했다. 뇌심부자극술에서 프로잭까지, 신경과학이 인간의 정신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채택한 언어는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글쓰기 같은 복잡한 행위를 뉴런의 상호작용이나 신경 질환의 한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의 접근은 ‘머릿속’이 궁금한 나머지 그 ‘머리 속’을 물리적으로 열어보는 행위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글이 쓰고 싶어지는 욕구를 의학적으로는 하이퍼그라피아라고 부른다. 신경학자들은 측두엽 간질이나 양극성 기분장애 등 뇌에 이상이 생기면 이런 증상이 발생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플로베르, 모파상 등 수많은 작가들이 간질을 앓았으며, 발작 경험이 있던 루이스 캐럴은 평생에 걸쳐 무려 98,721통의 편지를 썼다. 이들은 또 글쓰기가 막히면 괴로움 속에서도 실낱같은 영감을 얻기 위해 과감한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스티븐슨은 코카인을 다량으로 복용한 상태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썼으며, 사르트르는 흥분제를 자주 복용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가 하이퍼그라피아를 직접 겪은 환자였다. 쌍둥이 아들을 조산으로 잃고 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각한 산후 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당시 경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누군가 전원스위치를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많은 생각들이 나는 덮쳤고, 온 세상이 의미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하이퍼그라피아는 질병인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이었다.” 저자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과 작가들의 치열한 자기고백, 그리고 ‘과도한 글쓰기’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사례는 창작과 정신병,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믿음을 뒤흔들었다.

인간은 왜 글을 쓰는가? 아이를 잃은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그로 인해 발생한 조울증 때문일까? 단순히 뇌에서 일어난 전기적 발작 때문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이 책을 만드는 동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분리하려는 시도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이퍼그라피아가 정신병이든 아니든 인간은 글을 쓰며, 그럼으로써 만족과 위안을 얻는다. 저자의 말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뇌와 이성과 감정을 따로 떼어내고, 육체와 정신을 별개라고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적인 양극성 장애’일 수 있는 것이다.

간질 환자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것이 병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지금까지 몰랐던 삶의 고귀함을 느끼게 해준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의 말처럼 하이퍼그라피아를 통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만큼 부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 기획회의 171호
by 아마루 | 2006/03/07 19:14 | 이데아와 질료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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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앤샬리 at 2006/03/08 17:00
도입부터 결말까지 난 쏙 맘에 드는 걸! 오늘 내가 상규한테 그랬어. 네가 봐도 잘 쓴다고 그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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